[고칼럼] 서 있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초상화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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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모술수의 고전으로 꼽히는 ‘군주론(Il Principe)’은 오랜 시간 백수로 힘겹게 지내던 전직 외교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의 떠오르는 신흥 귀족 ‘메디치가’에 붙어 한 자리라도 얻어보기 위해 집필한 꽤나 분량이 되는 자기소개서와 입사지원서다. 정치의 목적인 ‘영광의 달성’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정당하다고 주장한 그는 거짓말이나 속임수, 때로는 백성들에 가하는 가혹한 형벌이 필요하다 내세우며 이른바 중세시대까지 한 몸통이던 정치와 도덕의 영역을 분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자는 함정에 빠지기 쉽고, 여우는 늑대를 물리칠 힘이 없다.’, ‘중립은 적을 만들고, 동맹은 친선을 획득한다.’, ‘가혹행위는 한 번에, 은혜는 조금씩 자주 베풀어라’와 같은 문구는 현대 정치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메타포로 자리 잡았다.

군주론에서 주목할 또 다른 부분은 바로 헌정사다. 마키아벨리는 “산이나 다른 높은 곳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래로 내려가고, 낮은 곳의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산 위로 올라간다. 마찬가지로 인민의 성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될 필요가 있고, 군주의 성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인민이 될 필요가 있다.”고 기술한다. 서 있는 곳이 바뀌면 바라보는 풍경도 바뀐다는 지극히 단순한 진리인데, 학설에 따라서는 이 대목을 근거로 군주론 집필의 진짜 목적이 인민들이 군주의 기만과 술책에 속지 않도록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인사청문회 이틀 만인 1일 오전 8시 김태엽 서귀포시장 예정자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출처:제주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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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룡 도지사가 끝내 김태엽 서귀포시장 예정자의 임명을 강행했다. 제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그는 요즘 더 높은 곳을 가겠노라고 공공연히 채비를 서두르는 중이다. 도의회 인사청문특위가 이미 알려진 음주운전을 비롯해 비서실장 재직 당시 친형의 제주에너지공사 사장 임명과 부인의 승진, 아들의 취업 등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고 재산 편법 증여 의혹과 부동산 투기 의혹까지 추궁했지만 속 시원한 해명을 하지 못한 김태엽 예정자다.

낮은 곳에 누워 있던 백성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제주 주민자치연대는 임명 강행을 분노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인사 폭거로 규정하며 임명 철회와 자진 사퇴를 촉구했고, 전국 공무원노조 제주지역본부는 도민을 섬김의 대상이 아닌 반목과 갈등의 대상으로 보는 것으로 스스로 통제하지도 못할 만큼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힐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명장을 수여한 원 지사는 장장 열흘간의 장기 휴가에 돌입했다. 행정시장 논란에 대한 아무런 입장을 들을 수도 없었고, 통상적으로 발표해 온 취임 2주년 메시지는 이번에는 생략했다. 지역 언론의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강희 논설주간의 모습의 아른거린다.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 적당히 짖어대다 알아서 조용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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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6년 도의원에서 국회의원으로 변신하며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 더불어민주당 위성곤 국회의원은 도의원 시절이던 2014년 행정시장 인사청문회 조례안을 제출한 바 있다. 제주도가 조례안이 도지사의 인사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재의를 요구하며 폐기돼자 그는 보도자료를 통해 “행정시장의 잦은 교체로 인해 행정의 연속성과 안정성이 보장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거공신을 위한 전리품이거나 논공행상에 따라 돌려막기 자리로 변질돼버렸다”며 “도둑맞은 행정시 독립성을 보장하고 기능과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시장에게 책임과 권한을 돌려줘야 한다. 그 방안이 하나로 인사청문 조례안을 발의했던 것”이라고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서귀포시 지역의 유일한 국회의원에게 서귀포시장 예정자의 논란과 인사청문회 결과에 대한 입장을 듣고 싶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의회에서 잘 판단할 일이다. 언급할 내용이 없다.” “자체적으로 있는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끝끝내 답변을 거부했다. 이미 서귀포시민연대와 농민회 등 12개 지역 시민단체가 부적합한 인사라며 지명 철회를 요구했지만 높은 곳에 있는 그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았다.

역시 서 있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인가 보다. 곳곳에 권모술수는 넘치고 낮은 곳의 분노는 높은 곳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2014년 6월 11일 본회의장 5분 발언을 통해 행정시장 인사청문회 도입을 촉구하는 당시 위성곤 도의원 <출처:제주도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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