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범 제주시장…그리고 2010년 6월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열렸던 지난 2010년 6월. 당시 민주당 제주도지사 후보였던 고희범 제주시장은 흥미롭게도 무소속 현명관 후보와 같은 건물(노형타워)에 선거사무소를 꾸렸다.

당초 한나라당 후보로 나설 예정이던 현명관씨는 친동생이 금품 살포혐의로 구속되면서 탈당했고, 우근민 전 도지사는 같은해 3월 민주당에 복당한 후 지방선거에 나설 예정이었으나 성희롱 논란으로 후보 자격을 박탈 당하자 무소속으로 나섰다.

여당 후보 없이 무소속 후보 2명과 야당인 민주당 후보 1명이 격돌하는 초유의 상황이 연출됐다. 물론 형식상으로 보면 무소속이었지만 한나라당 선거 운동원들은 대부분 현명관씨 캠프에서 상주하다시피 했다. 민주당 역시 우 전 지사가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당의 힘이 절반으로 쪼개진 상황. 지금 돌아봐도 그야말로 ‘콩가루’ 같은 선거임이 분명했다.

드디어 오후 6시 방송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나왔다. 우근민 42%, 현명관 40.8%. 짧은 환호는 있었지만 출구조사에서 이겼다고 좋아하거나 뒤쳐졌다고 낙담할 겨를이 없는 ‘초박빙’이었다.

반면 유일한 공당 출마자인 고희범 후보는 겨우 17%가 나왔다.

나는 당시 고희범 후보 선거사무소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출구조사가 나오고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내가 상주하는 사무소의 후보가 이기고 있으면, 일단 마음은 편해진다. 선거사무원이나 지지자들 누구도 기자들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 선거사무소에서 표정관리는 필수다. 즉, 출입기자들도 캠프 분위기에 따라 눈치를 보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원래 선거는 축제처럼 치러야 한다”며 애써 기자들에게 웃어 보였던 당시 고희범 후보가 기억났다. 지금 당장 당신이 선택받지는 못하겠지만 언젠가 지역을 위해 모종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운명적 시기가 오리라 확신했다.

그해 선거에서 4만8천명이 그의 이름을 선택했다. 최종 득표율은 18%.

고희범씨는 선거 이후 비영리단체인 제주포럼C를 만들었다. 제주의 구석구석, 마을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공부했고 주민들과 소통했다. 신선했고 진정성이 있다고 믿었다. 절치부심 끝에 4년 후인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도지사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본선에 나가지 못했다. 정치는 그의 인연이 아닌 듯 보였다.

그런 그가 지난해 여름 갑자기 제주시장에 내정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협치 인사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라는 아주 약간의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정치 도의상 터무니 없는 행위라는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심지어 “개인의 탐욕을 협치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는 안된다”는 도당 대변인 명의의 성명까지 나왔다. 도당위원장과 도지사 후보까지 지냈던 인물에게 정치적 사형 선고를 내린 셈이다.

그가 어떤 이유에서 행정시장 제안을 수락했는지 궁금해 인사청문회를 지켜봤다.

모두발언에서 일종의 회한이 느껴졌다. “고향을 위해 일하겠다고 제주에 온 지 10년이 되어 가지만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허락한다면 시장 임기 2년을 제 평생 마지막 일로 여기고 제주시를 조금이라도 편안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은 뒤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시장직을 본인 한평생의 마지막 과업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꾹꾹 눌러 담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와 한솥밥을 먹었던 도의원들이 맹공을 펼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원희룡 후보를 도왔는가?” “왜 미리 당적을 정리하지 않았나?” “협치가 아니라 야합 아닌가?”라는 질문공세가 이어졌지만 속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한 것 같다.

다만 그는 “민주당의 가치와 이념을 존중한다”며 울먹이는 모습을 보였고, “고 내정자를 선택한 이유는 말만 잘듣는 시장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는 도의원의 의견에 필요하면 목소리를 내는 시장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어느덧 취임 6개월을 맞고 있는 그의 약속은 어떻게 지켜지고 있을까?

국토부의 제2공항 타당성 재조사 용역 중단에 반발한 성산읍 난산리 주민 김경배씨가 단식에 돌입했다. 원희룡 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지만, 행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법적치물이라며 행정대집행을 예고했다. 사태의 본질과 메시지는 함구한 채 현상의 파편적 문제를 두고 제 갈길을 가겠다는 행정이다. 그 중심에 고희범 제주시장이 있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예전 민주당 해군기지특별대책위원장을 맡았던 고 시장은 지난 2011년 강정마을 경찰병력 투입을 앞두고 평화적인 사태 해결을 위해 주도적으로 나선 바 있다. 수 차례의 행정대집행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더구나 본인 스스로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근민 복당에 반대하며 단식 투쟁을 벌였던 전례도 있다.

고 시장이 원희룡 제주도정의 행정대집행 요구에 반기를 들거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원 지사의 눈 밖에 나서 해임됐을지 궁금하다. 도지사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올 수 있는 대책이 정말로 없었을까? 어쩌면 이번 순간이 그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정치적인 순간이 될 수도 있었음을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명분도 잃고 실리도 잃은 고 시장의 초췌한 말로를 지켜보며 2010년 6월을 기억하는 내 가슴이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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