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승의 비결’이냐 ‘관(官)의 도의’냐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전투인 한산도대첩과 명량해전에는 개인적으로 보기에 커다란 공통점과 차이점이 한 가지씩 있습니다.

한산도대첩의 경우 소위 이순신 장군이 잘 나가는 시절(?)에 병력과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치렀던 전투인 반면, 명량해전은 옥고를 치르다가 쫄딱 망해버린 조선수군을 떠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했던 전투라는 겁니다. 장군을 대표하는 두 개의 전투가 하필이면 인생의 정점과 바닥이 맞닿는 측면이 있습니다.

반면, 공통점은 적을 유인해 승리한 전투라는 겁니다. 넓은 바다에서 섬들이 촘촘하게 뒤엉킨 안쪽 바다로 끌어들인 한산도대첩과 하루에 물이 급하게 두번 바뀌는 죽음의 바다 울돌목에서 치른 명량대첩은 그런 면에서 닮아 있습니다.

제가 지금 한산도대첩과 명량해전 두 개의 전투를 뽑아 공통점을 소개하기는 했습니다만, 사실 세상을 바꾼 몇몇 전투를 들여다보면 이와 비슷한 유형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술의 본성을 ‘남을 속이는 것’이라고 정의내릴 경우 자주 사용되는 기법이 바로 ‘자극’과 ‘유인’, 그리고 ‘이간질’ 이죠. 치사하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투란 원래 그런겁니다. 상대를 자극함으로써 판단을 흐리게 하고 힘을 분산 시키는 사이에 그를 제거하고 나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죠.

영화나 전쟁사에서나 볼법한 이 기술을 눈 앞에서 똑똑하게 지켜본 기억이 있습니다. 제주해군기지 추진으로 제주가 한참 뜨거웠던 지난 2008년으로 기억하는데요. 마을주민들이 도청 건너편에서 집회를 하는 동안 길 건너 편에 실무자인 장교가 이과정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내 서로를 알아보자 몇 마디 욕설이 오갔고, 일부 주민들이 과격한 행동을 하려하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했습니다. “경찰들 뭐해 왜 불법시위 하는 사람을 지켜만 보고 있어. 빨리 연행해”라고 말이죠.

경찰이 얘기해주더군요. 주민들 자극하려는 술수라고… 시위대열 무너뜨리고 난장판으로 만들어서 어쩔 수 없이 경찰 투입하게 만드려는 것이라고요. 군이라는 조직에 크게 실망하게 된 계기로 기억합니다. 적에게나 사용할 법한 유인책을 자신이 보호해야 할 주민에게 사용하려고 했으니까요. 반대주민이 아무리 미워도 공적인 조직인 대한민국 해군이 그래서는 안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이 기억을 거의 10년 만에 다시 꺼내게 된 것은 순전히 원희룡 제주도정 때문입니다.

제주도가 어제 제2공항 추진을 반대하는 성산읍 난산리 주민 김경배씨와 제주녹색당원 등이 사용하고 있던 천막을 철거했습니다만, 결국 밤 사이 다시 원상복구됐죠. 한 동이 늘어났고 저항의 강도는 더욱 세졌습니다. 자연스럽게도 시위대의 감정이 격해진 것은 말할 나위 없겠죠.

8일 오전 제주도청 정문을 빠져 나가려던 원희룡 지사의 관용차가 이를 저지하려는 시위대와 충돌하는 우발적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도청 앞 도로가 아수라장이 됐고, 차를 막으려는 시위대와 이를 떼어내는 도청 공무원들 사이의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영상을 보니 자칫 위험한 순간도 있었고요, 주변을 지나던 차량들은 놀랐는지 경적을 빽빽 울려댔습니다.

행정이나 시위대 가운데 누군가가 계획한 모양새인지 저로서는 알길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전의 상황은 우발적인 것으로 알고 지나겠습니다.

그런데 원희룡 제주도정이 이날 오후 출입기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하나 보냅니다. 1시 조금 넘어선 시간에 ‘금일 13시10분 지사님 정문 출입 예정입니다. 현장에서 충돌 우려가 있으니 언론취재시 참고바랍니다.’라고 말이죠.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잠시 후 도청 정문 앞에서 난장판이 벌어질 예정이니 빨리 와서 취재하라’는 암시적 내용입니다. 4~5분 후에 도지사가 탑승한 관용차와 시위대가 충돌하는 상황인데, 어떤 미친 기자가 이 문자를 받고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충돌을 방지하고 막아야 할 행정이 대놓고 시위대를 자극하겠다고 알리는 겁니다.

정문에 기자들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시위대가 이를 모를까요? 눈치 빠른 누군가가 ‘10분에 이쪽으로 도지사 나온댄 햄수다. 모입서들~’ 이러지 않을까요? 드디어 10분이 되고 도지사의 관용차량이 나타나면 자칫 대형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성난 시위대의 분위기를 도정이 몰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이런 상황이 부담이 됐는지 몇 분 후에 다시 문자메시지를 보냅니다. ‘금일 13시10분 지사님 정문 출입 예정은 충돌이 우려되 취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라고 말이죠.

같은 일이 두 번 반복되면 우발적 상황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했습니다만, 원희룡 도정은 오늘 지방정부의 도의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스스로 증명하고야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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