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를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손 꼽히는 정치인의 가장 큰 덕목은 역시 ‘입’ 조심이다. 말 한 마디에 자신은 물론 삼족이 화를 당하는가 하면, 생각지도 못한 연줄을 잡아 성공가도에 오른 사례는 오히려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다.
역사의 발전과 함께 TV 기자회견이나 인터뷰, 의회 인터넷 중계 등 정치인의 ‘입’을 담아내는 도구는 다양해졌고 발전을 거듭해 왔다. 작은 숨소리와 미세한 감정까지 초고화질로 전해졌다. 다른 해석의 여지가 개입할 수 없는 현장 영상으로 많은 정치인들이 비운을 맞이했다. 드디어 기술의 진보가 정치의 진보로 이어진 듯 했다.
이때 몇몇 정치인들이 ‘문자메시지’를 구원의 도구로 떠올린 듯 하다. 텍스트는 간단하다. 텍스트는 표정이 없다. 텍스트는 해석의 여지가 많다. 텍스트는 유통이 빠르다. 단순히 생각해보아도 ‘문자메시지’ 텍스트는 정치를 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기에 좋은 도구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원희룡 제주도지사 역시 ‘문자메시지’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유독 ‘문자메시지’와 관련한 구설에 자주 올랐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가 아직 이 좋은 도구를 활용할 준비가 덜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이름하여 ‘문자게이트’다.
가장 최근 사례는 역시 이것일 것이다. 제2공항 타당성 용역 재검토 위원회의 활동 연장 무산에 반발하며 지난달부터 성산읍 주민 김경배씨가 텐트를 펼치고 단식에 돌입했다. 올해 초 이뤄진 행정대집행에도 불구하고 김씨와 시위대의 저항은 거세졌다. 도지사와 시위대가 조우할 때마다 충돌은 어김 없이 이어졌고, ‘이러다 큰일 나지’ 하고 조마조마한 심경으로 지켜보는 시선들이 하나 둘 눈을 떴다. 그러던 지난 8일 오후 제주도청이 기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금일 13시 10분 지사님 정문 출입 예정입니다. 현장에서 충돌 우려가 있으니 언론취재시 참고 바랍니다.’ 40여자 남짓한 짧은 문자였지만 텍스트의 ‘질감’이 읽혔다. 이 어이없는 문자 하나로 원희룡은 다수의 언론으로부터 ‘조리돌림’을 당했다. 낭패를 본 것이다.
글을 쓰며 지난 2014년 원 지사의 취임 이후의 기억을 파노라마 넘기듯 훑어봤다. 자연스럽게 원 지사의 첫 번째 ‘문자게이트’로 지난 2015년 8월에 있었던 백모 제주시청 국장 사건이 떠올랐다. 간부공무원이 한 일간지 기자에게 갑질과 폭행을 당했다며 자신의 억울한 심경을 담은 ‘문자메시지’를 건물에서 투신하기 전에 동료 공무원과 도의원에게 보냈다. 지역은 물론 전국을 발칵 뒤엎은 사건이다. 문자 내용이 일간지는 물론 방송과 인터넷을 뒤덮었다.
비록 원희룡 지사 쪽에서 작성한 ‘문자메시지’는 아니지만 수신자 가운데 현광식 당시 비서실장이 있기도 하거니와, 원 지사 직접 백씨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응원까지 했다. 지역 언론과의 일전을 준비하던 원희룡 도정이 의도적으로 문자를 유출시킨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됐다. 해당 기자의 갑질은 대법원에서 무혐의가 나왔고, 폭행 부분에 대해서만 벌금형이 내려졌다. 역으로 해당 기자는 쌍방 폭행을 벌인 백 전 국장을 재판에 세웠다.
두 번째 ‘문자게이트’는 두어달 후인 2015년 10월 한 언론인터뷰가 발단이 됐다. 당시는 박근혜 정부에서 단일한 체제의 국정교과서를 추진하고 있던 상황. 제주 4.3사건에 대한 왜곡 우려가 제기됐고, 실제로 일부 대목에서는 우려할 만한 수준의 기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원 지사가 국정교과서 도입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자 지역언론들이 이에 대한 사실 확인차 도지사의 입장을 재차 물었다. 도지사는 답변 대신 ‘노코멘트’라는 문자를 기자들에게 보냈다. 전국수석에 사법고시 수석이라던 제주의 자랑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 없는 순간이었다.
세 번째 ‘문자게이트’는 지난해 지방선거 과정인 5월 15일에 나왔다. 현재 단식 농성중인 김경배씨가 제2공항 원포인트 토론회장에 뛰어들어 당시 원 후보에게 계란을 던지고 자해를 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원희룡 캠프는 이를 곧바로 정치테러로 규정했고 김씨의 행동을 자해쇼라고 깎아내리는 ‘문자메시지’를 기자들에게 보냈다. 하지만 이내 이를 정정하는 문자를 다시 보내며 상황판단을 바꿨다. 쾌유를 기원한다는 덕담까지 보탰다.
잔재주와 꼼수는 유혹처럼 가깝고 정석은 성인의 말씀처럼 멀다. ‘자나 깨나 ‘文’ 조심’, 요즘 너무 ‘文’을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서 진심으로 건네는 충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