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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제주지부가 지난 18일 <제주교육공론화를 통해 제주외국어고등학교 이전에 대해 도민의 의견이 반영되기를>이라는 부제의 논평을 냈습니다. 전날 제주도의회가 제주외고 학부모와 지역주민 등 1500여 명이 제출한 <제주외고 공론화 추진 철회를 요구하는 청원>을 채택함에 따른 것인데, 현재 제주도교육청이 진행하고 있는 제주외고 이전 공론화 작업을 계획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전교조는 논평에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으로 현재 외국어 고등학교나 자립형 사립고는 2025년 3월 1일 이후 일반고등학교로 전환된다”며 “제주외국어고등학교 역시 일반고로 전환된다”고 소개했습니다. 이어 “제주외고 공론화는 일반고 전환의 문제가 아니라 학교 이전에 대한 문제”라며 “제주외고를 일반고로 전환했을 때 현재 비평준화 지역인 읍면 지역에 둘지, 이전을 통해 평준화 지역으로 옮길지에 대한 논의의 자리”라고 공론화 범위를 좁혔습니다.
지난 2월 정부가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 특목고의 존립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에 제주외고의 일반고 전환은 이미 확정된 사안이라고 바라보는 셈이죠. 때문에 공론화 논의의 중점을 학교 부지를 지금 위치에 둘지 아니면 제주시 동 지역으로 이전할지에만 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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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는 논평 마지막에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일부 선택 과목은 학급당 학생수가 40명이 넘는 상황”이라며 “교육여건 개선과 치열한 고교 입시 등을 해결함에 있어 제주외고의 제주시 동지역 이전이 해결의 단초가 될 수 있을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동지역 이전 논의에 대놓고 힘을 실었습니다.
전교조의 주장대로 (실제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2025년 이후에나 제주시 동지역으로 이전할 제주외고가 당장 확산하고 있는 코로나19 예방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저로서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만, 전교조의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은 사회 교과서에서 대한민국의 법 체계를 ‘헌법-법률-명령-조례-규칙’ 순이라고 배우고 있습니다. 규칙보다 조례가, 조례보다 명령이, 명령보다는 법률이, 그리고 법률보다는 헌법이 우선하는 사회적 약속을 배우고 있는 것이죠.
법률이 미처 살피지 못한 세부 사항을 규정하는 하위 체계가 바로 명령인데, 시행령은 대통령이 제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명령입니다. 다시 말해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언제든 번복하거나 수정 가능한 법체계에 대해 ‘정해졌으니 따라야 한다’고 전교조는 주장하는 셈입니다.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는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생산적인 토의나 논의의 장 없이 말이죠. ‘악법도 법이다’라며 독이 든 성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의 결연한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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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전교조에게 있어 잊지 못할 한해로 기록됐습니다. 형사상 유죄판결을 받아 직위 해제된 해직 교원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인 것은 교원노조법 상의 범위를 벗어난 ‘법외노조’라는 고용노동부의 판단을 서울행정법원이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도 전교조는 여러 차례 압박의 목소리를 높이며 시행령 개정을 요구해왔습니다. 이전 박근혜 정부의 잘못된 결정을 현 정부가 바로 잡으라는 것이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를 법원에서 결정하도록 했고, 현재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돼 최종 선고를 앞두고 있습니다. 자칫 정치적 사안으로 비칠 수도 있는 이슈를 사법의 테두리에서 판단토록 함으로써 더 이상 불필요한 논쟁을 끝내겠다는 의도임이 분명할 겁니다. 결정이 정치의 영역에서 내려진다면 분명 승복하지 않는 부류들이 있을 테니 말이죠.
글의 논점이 일탈할 우려가 있을 것 같아 개인적으로 이 과정에 대해 왈가왈부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전교조가 이 과정 전체를 잘못된 법해석과 적용이라고 인식하는 데 있다는 겁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제정된 교원노조법 ‘시행령’과 노동조합법 ‘시행령’이 전교조 탄압의 빌미가 됐다는 것이죠.
여기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탄압이라고 느낀 또 다른 사람들이 있나 봅니다. 바로 외고와 자사고 등 특목고 이해당사자들인데요. 지난달 전국 사립 외국어고등학교 16개 법인과 교사, 학부모 등이 외고의 일반고 강제 전환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출했습니다. 제주외고 학부모들과 지역주민들 역시 제주도교육청이 지금처럼 공론화 절차를 밀고 나간다면 법정 소송도 불사할 분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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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판단이 명확하게 나지 않은 상황에서 내려진 결정을 누가 승복하고 따를 수 있겠습니다? 이 점을 감안하면 제주외고와 관련한 논의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어야 합리적일 겁니다. 먼저, 논의의 중심에 아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모교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 우리의 아이들이 불안감을 느끼지는 않는지, 전문적 외국어 교육을 받길 원하는 중학생과 초등학생들의 다양한 수요는 없는지 등에 대해 말이죠.
그 다음으로 20년 가까이 운영된 제주외고는 제주 공교육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정확히 확인해야 할 겁니다. 제주외고가 심각한 사교육과 고교 서열화를 조장하지 않았는지, 대학 진학을 위한 입시학원으로 전락하지는 않았는지, 공교육의 다양성을 추구했는지 등에 대해 말이죠. 이 부분에 대한 논의가 끝나고 부정적인 결론이 내려지면 그때가서 동지역으로 이전할 것이냐 읍면 지역에 놔둘 것이냐를 얘기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제주외고 동지역 이전 추진이 누군가가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뤄지는 것이라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다. 다만 어른들의 성급한 결정과 선택적 해석, 이전투구로 아이들이 상처받는 일 만큼은 없길 바랍니다. 아이들은 지금 어른들의 모든 논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을테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