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칼럼] 지금 ‘여론조사’라는 유령이 제주사회를 떠돌고 있다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 논의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지역 사회가 ‘여론조사 블랙홀’에 빠졌기 때문이다. 김한규 더불어민주당 도당위원장이 자체 조사(5월 말 진행)를 이달 초 공개한데 이어, 어제(20일) 제주연구원이 다른 결과의 새 여론조사(7월 초 진행)를 내놨고, 오늘부터 제주도의회가 별도의 여론조사를 진행해 다음 달 2일 발표를 예고했다.

‘숫자’에 주목한 일부 언론은 부화뇌동(附和雷同)하며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정치권은 그 숫자에 기대어 명분을 쌓으려 했다. 조사 문항이 편파적이고 의도가 담겼다는 반발이 터져 나왔지만, 정작 결과를 수용하려는 이는 없다. 실타래는 꼬이고 혼란만 커지고 있다.

문제는 ‘정책 여론조사’를 ‘선거 여론조사’처럼 세팅하고 소비하는데 있다. ‘선거 여론조사’는 투표 결과와 직결되기에 순간의 민심을 읽고 전략을 다듬는 도구로 효용이 있다. 그러나 ‘정책 여론조사’는 성격이 다르다. 복잡한 이해관계는 물론 장기적 효과, 세밀한 설계가 필요한 사안인 만큼, 단순한 찬반이나 선택지의 수치만으로 결론낼 수 없다. 이번 제주연구원의 문항처럼 “민주성 강화와 불균형 해소를 위해 기초자치단체 설치를 추진한다”라는 전제를 덧붙인 질문은 이미 방향을 유도한다. 객관적 민심을 묻기보다 원하는 답을 끌어내려는 ‘정치적 장치’에 가깝다. 제주 사회의 ‘씽크 탱크’를 자임하는 연구원이 스스로 신뢰를 허무는 자해적 행위다. 김한규 위원장의 조사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방향을 유도해 진행된 것으로 의심되는 제주연구원의 설문조사 결과

여론조사를 항해(航海)에 비유해보자. ‘선거 여론조사’는 항구를 눈앞에 둔 배가 마지막으로 돛을 조정하는 일과 같다. 목적지가 분명하고, 순간의 바람과 파도를 읽어내는 일은 촌각(寸刻)을 다툰다. 반면 ‘정책 여론조사’는 대양(大洋)을 건너는 장기 항해에 가깝다. 항로가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변수도 많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나침반은 필요하지만,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배의 진로를 틀면 결국 표류할 수밖에 없다. 지금 제주처럼 ‘정책 여론조사’를 ‘선거 여론조사’처럼 다루는 것은 바다 위에서 맴도는 배와 다르지 않다.

정책은 여론의 파동만 좇아서는 결코 성과를 낼 수 없다.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처럼 복잡하고 중장기적인 과제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이미 1년 넘는 공론화 절차와 숙의 과정을 거쳐 ‘3개 행정구역 체제’라는 권고안이 마련됐다. 이를 외면한 채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하며 즉흥적 여론조사로 방향을 재단하려는 시도는 ‘민주주의의 탈을 쓴 반지성주의’다. 당사자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는 점에서 유독 씁쓸하다.

여론조사는 민주주의의 보조 장치이지, 정책 결정을 대신하는 도구가 아니다. 제주 사회가 지금 필요한 것은 숫자 경쟁이 아니라 책임 있는 합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항로를 잃은 배처럼 바다 위를 맴돌다, 결국 어디에도 닿지 못할 것이다.

제주도의회가 21일부터 26일까지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 관련 여론조사 설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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