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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증거하라. 그것이 기자의 숙명이다.”(김훈)
편하게 기자질 하려면 방법은 간단하다. 나오는 보도자료만 잘 쓰면 된다. 드라이하게 쓰면 단신이고, 꼬아 쓰고 뒤집어 쓰면 은근히 취재기사와 비슷해지는 마력을 발휘한다. 개인적으로 모니터하고 있는 4개 일간지(한라일보, 제주신보, 제민일보, 제주일보)의 상당수 기사가 솔직하게 말하면 이렇게 보도자료를 기초로 만들어진다. 기자 한 명이 하루에 20~30개의 기사를 올리는 인터넷신문이나 방송사 뉴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이 보도자료에 의존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채워야 할 지면은 많은데 인력과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매일 16면을 찍어내는 신문의 취재기자가 채 16명도 안된다. 2명이 쓰는 기사로 채우는 경우도 봤다. 이러니 기사의 퀄리티를 따져 무엇하랴.
무엇보다 보도자료를 기초로 작성되는 기사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기사의 문제를 1차적으로 자료의 오류에서 찾기 마련이다. 신문 입장에서 쪽팔리기는 하겠지만 자료 제공처로 책임전가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괜히 취재한답시고 언론중재위나 소송 같은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공무원이 이를 잘 알고,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도 이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지역 언론이 검증할 시간과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때문에, 거친 주장과 날이 선 발언을 여과 없이 배설하고, 언론은 이를 받아 쓴다. 몇몇 언론사에게만 은밀한 정보를 흘리는 척 소위 ‘따옴표 저널리즘의 문제’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심지어 큰소리만 뻥뻥 치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언론에게 검증 책임을 떠넘기는 경우도 많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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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더불어민주당 송재호 후보 부친에 대해 표선면 대동청년단장 논란이 제기됐을 당시 단순하게 “뭔가가 있겠구나” 생각했다. 문제 제기가 있으니 조만간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데이터가 나오려니 짐작만 했다. 이내 피로감이 몰려왔다. “부친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혀라”는 주장만 반복되고 더 이상 진전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설 자리를 잃고 주장과 호통만 남아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자백만 강요하는 셈이다.
16일자 제주일보의 시도(“송방식씨, ‘대청’ 단장 맞지만 희생 막아”)는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만 했다.학살 책임과 같이 복잡 다단한 논란을 한 꼭지의 기사로 온전히 풀기는 어렵겠지만 모처럼 보도자료의 울타리를 벗어난 의미있는 시도로 보였다. 김동만 4·3 연구소 이사와 박찬식 전 제주학센터장, 안봉수 4·3 희생자 유족회 표선면지회장의 입을 빌어 송 후보 부친의 역사적 파편을 주워 모았다.
“송방식씨에 대해 당시 체험자, 유족들의 증언과 자료는 지역주민들을 살리고 도움을 준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김동만)
“송방식씨가 표선면 대청단장을 지낸 것은 사실이나 아직까지 표선면 관내에서 송방식씨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다”(박찬식)
“의혹이 제기된 후 각 마을 이사들로 하여금 다시 조사를 해 보라고 했는데 학살 혹은 악행과 관련해 나오는 얘기가 없다”(안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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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뜨자 송재호 캠프 관계자와 지지자들은 환호를 부르며 SNS에 퍼 날랐고, 박희수 캠프 지지자들은 불만을 터뜨리며 댓글을 달았다. 그러면서 메신저를 도마 위에 올렸다. 인터뷰이(interviewee) 가운데 한 사람은 친구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동서지간, 나머지 한 사람은 2014년 원희룡 도정 출범 당시 인수위에서 활동했던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모든 인터뷰 발언이 부정당했다. 기레기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제주일보가 송재호 후보를 편들기 위해 해당 기사를 썼을까? 일부 들은 얘기가 있지만 적어도 지역 일간지를 몇 달째 모니터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간 해당 신문이 ‘지면’을 통해 송 후보를 도우려는 객관적인 시도를 발견하지 못했다. 특수 관계에 있는 당사자들의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전혀 납득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인터뷰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정서에만 호소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기사가 정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또 다른 진술을 찾아내면 된다. 송 후보의 부친이 관여했음을 알리는 진술을… 언론도 찾아야겠지만, 송 후보의 책임을 주장하고 싶은 쪽이 먼저다.
기사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 편이 아닌 것 같다고 ‘기레기’ 취급을 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천천히 살피고 정말 문제를 발견하면 그때 조롱해도 늦지 않는다. 보도자료만 써도 기레기, 취재를 해도 기레기…참으로 기자질 해 먹기 어려운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