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성역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이름 알리기’
– 대통령 방문 노린 볼성 사나운 ‘자기 정치’


제주 4·3 평화공원 입구는 단순한 도로가 아니다. 78년 전 국가폭력으로 스러져 간 수만 영령의 넋이 잠든 곳으로 향하는 ‘들머리’이자, 남겨진 유족들이 평생의 한을 품고 오가는 ‘참배의 길’이다. 이곳에 걸리는 현수막 하나에도 ‘절제와 예우’가 깃들어야 함은 제주 공동체의 암묵적인 약속이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 그 약속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내건 현수막 때문이다.
■ 경건한 참배의 길에 ‘자기 이름’ 내 건 국회의원
오영훈, 송재호, 위성곤 등 과거 더불어민주당의 전임 도당위원장들이 4·3 추모 시기에 내걸었던 현수막은 늘 ‘더불어민주당 제주도당’ 명의였다. 정당의 이름 뒤에 개인을 숨기고, 오직 정당이라는 ‘공적 기구’가 도민과 함께 고개를 숙인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평화공원이라는 공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그런데 올해 평화공원 어귀를 메운 민주당의 현수막에는 ‘김한규’라는 세 글자가 뚜렷하게 박혀 있다. 글자 크기 역시 당의 이름보다 위원장 개인의 이름이 더 먼저 눈에 들어오도록 인쇄됐다. ‘기본소득당 제주시지역위원회’라고 단정하게 단체 명의만을 내건 옆의 현수막과 비교하면 더욱 민망한 풍경이다. 소수 정당도 지키는 ‘선’을, 제주의 1당이자 책임 있는 공당의 수장이 앞장서 넘어간 것이다.


■ 대통령 동선에 맞춘 ‘눈도장’ 정치?
공교로운 것은 그 타이밍이다. 현수막은 이재명 대통령이 4·3 추념일을 앞두고 평화공원을 방문하는 하루 전인 28일 설치됐다. 대통령의 발걸음이 향하는 길목마다 김한규 위원장의 이름이 적힌 현수막이 도열하듯 배치된 것을 우연으로 봐야할까?
결국 대통령을 향한 기회주의적 과시이자, 중앙 권력에 자신을 각인시키려는 고도의 정무적 계산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김 의원의 눈물겨운 ‘눈도장 찍기’를 위해 4·3의 추모 현장이 이용되는 것이다. 그에게는 유족들의 슬픔보다 대통령의 관심이 더 중요했던 것일까?
■ 4·3은 정치적 소모품이 아니다
6월 지방선거 후 7월 임기가 끝나는 김한규 도당위원장은 차기 행보로 중앙당 ‘최고위원’을 염두에 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의 마음이 조급한 것은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4·3이 누군가의 입신이나 정치적 이해 관계를 위한 마케팅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4·3 특별법 개정과 진상규명의 성과를 자신의 이름 앞에 전리품처럼 내거는 행태는, 78년 세월을 피눈물로 견뎌온 유족들에 대한 모독이다.

■ 정치는 때로 ‘나’를 지울 때 가장 크게 빛난다
1970년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 위령탑 앞에서 보여준 ‘무릎 꿇기’는 정치적으로 영원히 회자될 장면이다. 장황한 연설이나 자신의 이름을 새긴 화려한 선전물 대신, 오직 침묵 속에서 자신을 낮추는 행위 하나로 전 세계에 사죄의 진심을 전했다. 자신을 철저히 비워냄으로써 오히려 독일의 도덕적 권위를 세우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것이다.
추모의 현장에서 정치인 개인이 돋보이려 할 때, 그 추모의 진정성은 오염된다. 김한규 위원장과 민주당은 지금이라도 평화공원 입구에 걸린 본인들의 현수막을 돌아보길 바란다. 그곳에 적힌 이름 석 자가 영령들을 향한 진심 어린 위로인지, 아니면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욕심의 흔적’인지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