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임기를 시작한 제18대 고의숙 제주특별자치도교육감의 굵직한 선거 공약들이 9월 세 차례의 ‘도민평가단’ 회의를 거쳐 대거 파기·축소 수순을 밟고 있는 가운데, 법적 근거인 ‘제주특별자치도교육감 공약사항 관리 규칙’ 개정 작업이 공약 후퇴에 면죄부를 부여하고 행정적 책임을 털어내기 위해 설계된 정지작업이라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공약 파기를 주도한 회의를 운영하는 데 특정 민간단체 관계자들의 강연료와 회의 진행비로 1300만원의 혈세가 고스란히 쓰인 사실까지 새롭게 드러났다.
▲ 공사 끝내고 설계도 작성?…회의부터 열고 규칙으로 소급 적용
본지가 확보한 내부 결재 문서들에 따르면, 도교육청은 고 교육감 취임 직후인 지난 7월 16일 ‘제18대 도교육감 공약실천계획 수립 및 관리 계획’에서 “9월 1일부터 30일 사이 공약실천위원회(도민평가단) 1~3차 회의를 열어 공약실천계획안을 숙의하고 승인한다”는 타임라인을 확정해 둔 상태였다.
실제 도교육청은 9월 1일 첫 회의를 시작으로 7일 2차 회의, 15일 3차 회의를 연이어 개최했다. 문제는 도민평가단의 설치 근거를 담은 규칙 개정안이 이달 4일에야 공포·시행됐다는 점이다. 1일 열린 1차 회의는 자치법규가 효력을 발생하기 전인 셈인데, 정해둔 결론(공약 축소 및 폐지)과 일정에 맞추기 위해 법적 근거도 없이 기구를 먼저 가동한 절차적 위법이라는 비판이다.

▲ 평가단에 최종 변경 권한 부여했다지만
개정 규칙의 조문을 뜯어보면 도교육청의 의도가 좀 더 고스란히 드러난다. 개정 전 규칙에 명시되어 있던 “도교육감이 공약 변경 내용을 최종 확정한다”는 문구를 전면 삭제, “도민평가단의 심의를 거쳐 변경한다”로 대체했다. 공약 이행의 최종 책임자인 교육감은 법규 뒤로 쏙 빠지고, 공약 축소 및 파기에 따른 비난의 화살을 35명의 도민과 학생들에게 떠넘긴 것이다.
공약 변경에 따른 껄끄러운 송곳 검증도 원천 봉쇄됐다. 예산과 법리를 깐깐하게 따질 수 있는 전문가 그룹인 ‘공약추진위원회'(15명 이내)를 신설했으나, 공약 변경 시 이들의 권한은 구속력 없는 의견 반영 수준으로 묶어버렸다. 반면, 집행부의 설명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평가단에게는 공약을 확정 짓는 심의 권한을 몰아주었다. 집행부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쉬운 비전문가 기구를 거수기로 앞세우기 위해 권한 구조를 교묘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세팅한 셈이다.

▲ 세 차례 회의 혈세 1300만원 펑펑… 공약 파기도 ‘아웃소싱‘
교육감의 공약을 변경할 수 있는 평가단이라 할지라도 해촉이 가능해졌다. 개정 규칙은 “평가단의 목적, 기능 등에 반하는 행위를 하였을 경우” 교육감이 임기 중이라도 위원을 해촉할 수 있도록 했다. 집행부의 공약 축소 논리에 반대하거나 쓴소리를 내는 위원을 언제든 자의적 기준으로 솎아낼 수 있는 일종의 ‘입막음용’ 칼자루를 교육감 손에 쥐여준 것으로, 집행부의 입맛대로 위원들을 통제하기 위한 독소조항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나아가 개정 규칙 제15조는 “시민단체 또는 언론기관에서 실시하는 공약평가 및 매니페스토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는 조항까지 이례적으로 박아 넣었다. 특정 단체명을 연상시키는 조항을 못 박은 배경은 이번 평가단 운영 예산 집행 내역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교육청은 보름 남짓 진행된 단 세 차례의 회의를 위해 약 1300만 원의 예산을 쏟아부었다. 본지 확인 결과 이 예산의 대부분은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관계자들의 강연비, 회의 진행비, 분임별 조정자(퍼실리테이터) 파견 비용 등으로 집행됐다. 도교육청이 져야 할 공약 파기의 책임을 면탈하고 외부 평가 점수를 감안해, 혈세를 들여 특정 민간단체에 공약 세탁 외주를 맡긴 꼴이 됐다.

▲ “권한 내려놓기”라는 교육청… 법리 및 정서 무시한 궤변만
이 같은 문제 제기에 대해 제주도교육청 관계자는 “부칙 경과조치 제2조에 종전 규칙에 따른 공약실천위원회를 도민평가단으로 본다고 되어 있어 규칙 개정 전 회의 개최에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또 공약 변경 최종 확정권자에서 교육감을 뺀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교육감이 자신의 권한을 내려놓은 것으로 봐야 한다”며 “해촉 조항과 매니페스토 협조 조항 역시 타 시·도 교육청의 규칙을 두루 참고해 반영한 사항”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해명조차 궁색한 궤변에 불과하다. 해당 규칙의 시행일(부칙 제1조) 자체가 9월 4일인 만큼, 부칙의 경과조치 역시 9월 4일 공포 이후부터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이다. 법적 효력도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부칙 조항을 사흘이나 앞당겨 소급 적용한 셈이다. 나아가 선거 당시 유권자와 약속한 핵심 공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최종 책임자 자리에서 슬그머니 이름을 지운 것을 ‘권한 내려놓기’로 포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책임 전가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처럼 위법적인 소급 행정과 꼼수 규칙의 비호 아래, 초등 70만 원·중고등 50만 원이던 입학준비금은 반토막 났고 4·3 평화교육관 건립 등 핵심 공약들은 전면 백지화 수순을 앞두고 있다. 결국 이번 사태는 ‘소통과 숙의’라는 거버넌스의 외피를 두른 채, 교육감의 치적 홍보용 평가를 챙기고 부담스러운 선거 공약을 털어내기 위해 법과 원칙, 그리고 혈세마저 도구로 전락시킨 총체적 행정 참사로 기록될 전망이다. 교육의원 시절 도교육청의 예산 낭비와 불투명성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감시했던 고의숙 교육감은, 정작 자신의 공약 후퇴 앞에서는 위법적 소급 행정과 꼼수 규칙 뒤에 숨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