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민 앞에 고개 숙이는 정치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은 중차대한 현안입니다. 민생과 제주도민의 삶의 양식까지 영향을 미치는 매우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사안이면서도 발등의 불입니다. 민선 9기 출범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지금, 주민투표로 제주의 미래를 결정해야 할 귀중하고 엄중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국회의원과 도지사와의 입법 갈등, 도의회 의장의 전격적인 여론조사 추진 등으로 혼란이 가중되며 정치권이 도민사회의 불안을 키우고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로서, 또한 선출직 도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까움을 넘어 창피하고 무력감을 느끼며, 도민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세계정치가 요동치고 국정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이때, 제주 정치가 마땅히 도민의 뜻을 하나로 모아 앞으로 나아가도 부족할진대, 오히려 혼란을 가중하는 모습에 도민 여러분 앞에 고개를 들 면목이 없습니다. 제주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도민사회의 복리 증진을 위해 도민 삶을 살피고 지역 현안을 잘 해결하라고 주민의 귀한 선택을 받은 선출직 공직자로서 정치 본연의 역할과 기본자세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2. 해묵은 과제, 국가적 과제로 발전하다
아시는 것처럼, 제주형 행정체제 개편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2006년 기존 4개 시‧군이 폐지된 이후 양 행정시의 한계를 경험한 모든 도민이 지속적인 문제를 제기해 왔던 해묵은 현안이자 완결되지 못한 숙제입니다.
오영훈 도정은 이번에야말로 소모적 논쟁을 종식하겠다고 제1 공약으로 행정체제 개편을 제시했습니다. 도민들 또한 이번만큼은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간절한 기대를 하고 선택했고 함께 이끌어 왔습니다.
특히, 민선 8기 출범 이후, 오영훈 지사와 의회, 그리고 많은 도민의 염원과 애씀 덕분에 이재명 대통령의 국민주권정부 국정과제에 “지역 주도 제주형 기초자치단체 설치 지원”이 반영되는 큰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법인격 있는 완전한 기초자치단체 설치는 단순한 제주의 희망 사항이 아니라 국가의 과제로 확정된 것입니다. 20년 전 시군통합으로 법인격이 폐지된 이래 가장 큰 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재 행정구역 선호에 따른 정치적 이해득실이 개편의 발목을 잡은 현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3. 도민 숙의로 도출된 ‘3개 구역 안’
작년 7월 제주도정은 ‘동제주시‧서제주시‧서귀포시’로 구성된 ‘3개 구역 기초자치단체 설치안’을 도민의 뜻으로 수용하고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주민투표 실시를 건의했습니다. 이 ‘3개 구역 안’은 지난 2년간 숙의형 공론화 과정을 거쳐 도출된 도민의 잠정적인 뜻입니다.
제주특별자치도 행정체제개편위원회에서 300명의 도민참여단이 참여한 4회의 숙의 토론과 설문조사, 4회의 도민 여론조사, 48회의 도민 경청회, 3회의 전문가 토론회 등을 통해 도출된 소중한 결과입니다. 이는 단순히 “행정구역이 몇 개냐?”라는 질문에 즉답한 여론조사가 아니라, ▲세수 불균형 ▲예산 문제 ▲청사 설치의 비용과 위치 ▲공공서비스 체감도 ▲책임행정 등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토론해 도출된 결과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꾸준히 4개 구역(제주시, 서귀포시, 동제주군, 서제주군)이 바람직하다는 소신을 가져왔습니다. 오영훈 지사 역시 5~6개 구역의 기관 통합형을 선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민참여단의 공론화 결과가 3개 구역 안이었기 때문에, 선출직인 우리는 도민의 뜻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희룡 도정처럼 공론화 권고를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3개 구역 안’은 지역 균형발전, 지역 간 선의의 경쟁, 접근성 향상, 국회의원 지역구 일치, 행정비용 절감, 제주시 일극화 방지 등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한계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숙의와 공론으로 도출되고 도지사가 이를 존중한 만큼, 주민투표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주민투표야말로 제주의 미래를 도민이 직접 결정하는 길입니다.
4. 정치적 이해관계가 불러온 혼란
그럼에도 최근 상황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그동안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마련한 도민의 뜻을 무시하고, “제주시를 동서로 나누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는 주장과 함께 새 법안을 내거나 공론화 자체가 불공정했다는 식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기초자치단체가 꼭 필요하냐는 주장까지 나오며, 현 체제 고수론이나 법인격 없는 행정시장 직선제 논의로 도민사회의 혼란을 키우고 있습니다.
특히, 민선 8기 2년간의 공론화 과정을 몰랐던 것처럼 말하며 “제주시 쪼개기 방지”라는 부정적 정치 수사를 사용하는 것은 우려스럽습니다. 이는 도정과 도민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행정안전부가 “2개냐, 3개냐 합의가 없다”라며 주민투표를 미루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통탄스러운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봉 의장이 도의회 차원의 여론조사를 제안한 것은 고육지책일 수 있으나, 또 다른 갈등과 혼란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여론조사는 법적 대표성도, 구속력도 없고, 각 진영이 결과를 자기 입맛대로 해석할 것이 뻔합니다. 이는 2년간의 공론화 과정을 1,500명 표본으로 번복하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정당성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5. 주민투표로 도민 주권 완성해야
이제 우리는 근본적 질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 행정체제 개편을 추진했습니까? 그것은 ‘제왕적 도지사 권력 분산’, ‘도민 주권 강화’, ‘지역 균형발전 실현’을 위해서입니다. 오영훈 도정은 권한을 내려놓고 도민의 자기결정권을 회복하려는 진정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도민 여러분, 이제는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2026년 7월 출범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전망도 있습니다. 선거구 획정, 제주특별법 개정 등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3년간 도민이 이뤄낸 숙의와 합의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른 시일 내 행정안전부 장관이 주민투표 실시를 요구해, ‘제주형 기초자치단체 설치와 3개 구역 안’에 대해 도민의 최종 의사를 확인해야 합니다. 제주의 미래는 대리인이 아닌 도민 스스로가 직접 결정해야 합니다.
정부가 수도권 공화국을 깨고 5극 체제로 지역 균형발전을 이루려는 것처럼, 제주 또한 제주시 일극 체제를 넘어 3개 구역으로 나눠 균형적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이 귀한 기회에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도록 도민 모두가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정치는 대리인에 불과합니다. 주권자는 도민이며, 도민의 뜻을 받드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저는 제주특별자치도의회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로서, 도민 여러분과 함께 제주도의 미래 발전을 위해 끝까지 책임 있는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