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도성] 매주 목요일 돌아오는 <뉴스톡> 코너입니다. 오늘도 시사 팟캐스트 <고칼의 제주팟> 고재일 시사칼럼니스트 전화로 연결돼 있습니다.
[고재일] 모처럼 미세먼지 하나 없이 화창한 봄날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역시 제주의 4월은 아픕니다. 어제 제주 4.3 71주년 추념식이 열렸는데요. 혹시 류도성 아나운서 추념식 장면 보셨는지요? 어떤 장면이 기억에 남으세요?
[류도성] 아마, 저 뿐만이 아닐겁니다. 역시 김연옥 할머니의 사연이 소개되는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요. 대학생인 손녀딸이 할머니의 당시 사연을 편지로 전하고 있을때 할머니가 오열하시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습니까?
[고재일] 네, 그렇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사연이었습니다. 할머님의 온가족이 바다로 버러졌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생선 한 조각 드시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뻔했다는 정말 기막힌 사연이었죠. 그 모습을 본 전국민들의 눈시울도 함께 붉어지셨을 겁니다. 아무튼 손녀딸의 얘기대로 이제부터는 매일 웃으면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서론이 좀 길었는데요. 오늘은 이와 관련해서 이번 71주년 제주 4.3의 성과와 과제들에 대해 한번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류도성] 이번 추념식의 성과 말씀이죠? 지난해의 경우는 그래도 ‘전국화’라든가 ‘대통령의 추념식 참석과 공식 사과’ 같은 비교적 눈에 보이는 성과들이 많았던 것 같기는 해요. 그런데 올해는 가장 큰 화두인 특별법 개정안 통과가 실패하면서 조금 의미가 퇴색됐다는 목소리가 많은 것 같습니다만?
[고재일] 사실 가장 도민 사회와 유족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기대했던 부분이 그 내용입니다만, 그 부분에 잠시 후에 과제를 다룰때 짚어보기로 하고요. 그래도 정말 큰 성과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사건 당시 공권력으로 상징되는 군과 경찰의 공식 사과가 있었다는 겁니다.
사건 발발 당시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인 미군정 시기 아니겠습니까? 당시 경찰 최고 책임자이자 강경 진압론자로 손꼽히는 인물이 바로 조병옥 경무부장이거든요.
[류도성] 경무부장이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이라는 말씀이시죠?
[고재일] 네, 그렇습니다. 어떤 연예인들은 경찰청장인지 경찰총장인지 용어를 헷갈리기도 합니다만. 그동안 경찰 최고 책임자의 명칭은 경무부장에서 치안국장, 이후 치안본부장을 거쳐 경찰청장 등으로 바뀌어 왔거든요. 모두 65명이 이 자리를 거쳤왔지만, 제주 4.3에 대한 특별한 유감이나 입장 표명은 없었던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제 민갑룡 제21대 경찰청장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추념식 자리에 참석해 공식 사과했습니다. “4.3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모든 분들의 영정에 머리 숙여 애도의 뜻을 표한다”며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께 분명히 사죄를 드리는 것”이라고 말이죠.
[류도성] 사실 4.3 사건의 발발 원인으로 일반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당시 경찰과 서북청년단원들의 탄압이나 가혹한 수탈 아니겠습니까?
[고재일] 네, 그렇습니다. 요즘은 비교를 할 수 없습니다만, 해방공간 당시만 하더라도 조직 규모나 무장 수준을 따져 놓고 보면 경찰이 군을 훨씬 앞선 상태였다고 합니다. 미군정 역시 군 보다는 경찰 조직을 많이 신뢰한 관계로 정치적 파워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만큼 경찰총수의 공식 사과는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진압 과정에 대한 사과는 물론이고요, 해석하기에 따라 사건 발생에 대한 경찰의 책임도 어느 정도 인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류도성] 그렇군요. 당시만 하더라도 경찰에 비해 좀 작은 조직이라고 짚어주기는 했습니다만…또 다른 당사자이기도 한 국방부 역시 공식 사과에 나섰죠?
[고재일] 네, 그렇습니다. 제주 4.3 사건 발발 초기에는 정식 명칭이 국군이 아니라 ‘국방경비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비대라는 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라를 지키고 경비하는 부대라는 의미가 아니라 ‘경찰 예비대’를 줄인 말이라고 해요. 명칭에서부터 다시 한번 당시 경찰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시리라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군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그러니까 4.3 사건 발발 이듬해부터 이뤄지면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초토화 작전’의 핵심 주체였다는 겁니다.
[류도성] 그때부터는 군의 책임이 컸던 것이군요?
[고재일] 네, 그런 셈입니다. 초대 이승만 정부가 1948년 11월에 제주에 계엄령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물론 계엄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계엄령을 발령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계엄령 이후부터는 모든 지휘 책임이 경찰이 아닌 군에 있었던 겁니다.
국방부 차원에서 어제 “제주4.3특별법의 정신을 존중하며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것에 대해 깊은 유감과 애도를 표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고요. 오후에는 서주석 차관이 광화문 추모공간을 찾았는데요. “아픈 역사로 안타깝게 희생되신 분들의 영전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유가족분들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올린다. 이제는 과거의 아픔을 온전히 치유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라는 방명록 글을 남겼습니다.
[류도성] 사과 표현이 한 단계만 더 깊게 들어갔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인데요. 당연한 질문입니다만, 유족들께는 모처럼 기분 좋은 소식이 아닐까 싶어요?
[고재일] 네, 그렇습니다. 제주 4.3희생자유족회가 성명을 냈는데요. “국방부의 입장발표와 경찰청장의 참배는 그동안 유족들의 가슴을 옥죄어 왔던 원망과 분노를 다소나마 풀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반색했습니다. 다만 추가적인 조치 약속 등이 누락된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다시는 이 땅 위에 4.3과 같은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국민을 최우선으로 위하는 군경으로 거듭나길 당부한다”고 손을 잡았습니다.
이 밖에도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습니다만 SNS를 통해 배보상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물론이고요. 어제 두 곳의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가 있었음에도 국내 정치권 주요 관계자들이 모두 참석하는 대표적인 행사로 거듭난 점이나, 방송 등 언론매체 그리고 SNS를 통해 전국민이 보여준 관심은 이제 어느 정도 전국화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를 충분히 주고도 남았던 것 같습니다.
[류도성] 국가 공권력의 상징인 군경의 공식사과가 있었다는 점이 71돌을 맞은 이번 추념식의 성과라고 정리를 해주셨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야할 길이 멀죠?
[고재일] 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현재 4개 개정법률안이 제출되어 있죠. 희생자 배보상과 명예회복, 트라우마센터 설치, 왜곡 유포자 처벌 등의 내용을 담은 4.3 특별법 개정안의 처리가 시급합니다. 여야 모두 적극 협조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정치권의 이해관계나 역학구도 등을 따지다보니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죠. 더구나 20대 국회의 임기가 이제 1년여 밖에 남지 않은 정치권 상황을 감안하면 ‘솔직히 상임위 통과라도 가능할까’ 의구심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제주 지역 정치권은 물론 정부, 여당의 정치력과 야당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이 밖에도 제주 4.3의 정명을 찾는 것 또한 병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어쨌든 직접적인 사건의 발단이 1947년 4월 3일 남로당의 경찰 습격이고, 이후 국가공권력의 무고한 학살로 진행된 비극이다보니 지금까지도 성격 규정이 어려운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러나보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고 일부 정치세력은 사건의 부분을 확대해 왜곡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있어왔던 것이 현실이거든요. 이런 상황이 유가족분들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때문에 시일이 다소 걸리더라도 4.3의 정명을 찾는 역사적, 학술적 뒷받침이나 국민 공감대 확산 역시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류도성] 사실, 제주도민이 아니면 누가 대신해 줄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고재일]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제는 제주 4.3 사건의 외연을 넓히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떠오를 것 같습니다. 제가 학창시절에 배울 때만 하더라도 ‘반란사건’이라고 했습니다만, 이제는 제주 4.3처럼 ‘여순사건’이라고 하죠. 그만큼 역사적 사실의 무게 중심이 국가 폭력으로 기울고 있다는 뜻이겠죠. 여순사건 역시 특별법 제정의 움직임이 일고 있지 않겠습니까? 해방공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잔인한 폭력으로 특히 제주 4.3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성격의 사건인데요. 더디 가더라도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요즘 많은 것 같습니다. 제주도민 사회 역시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문제라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류도성] 네, 지금까지 고재일 시사칼럼니스트와 함께 71주년을 맞은 제주 4.3의 성과와 과제에 대해 짚어봤습니다. 오늘 소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