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을 두고 “북한 김일성의 지시로 촉발됐다”고 반복 주장한 태영호 전 국민의힘 국회의원에 대해 법원이 처음으로 4·3 희생자와 유족 등 집단적 명예를 훼손했다고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도민 사회에서는 늦었지만 중요한 사법적 판단이라는 평가와 동시에 “4·3 왜곡의 재발을 처벌할 법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는 요구가 다시 커지고 있다.
제주지법 민사21단독(오지애 부장판사)은 10일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개인 원고 3명이 태 전 의원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에서 유족회에 대한 위자료 1000만 원 지급을 명령하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4·3 수형 희생자인 오영종 씨와 유족 양성홍·김창범 씨가 제기한 개별 손해배상 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태 전 의원의 발언을 명확한 ‘허위사실 적시’로 규정했다. 오 부장판사는 “태 전 의원의 주장은 뒷받침할 객관적 근거가 없고, 국가가 공식적으로 채택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도 반한다”며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이 성립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어 “다만 희생자·유족 개개인을 특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개인 청구는 기각했다.
태 전 의원은 지난 2023년 SNS와 보도자료, 방송 및 공개 연설 등을 통해 “4·3은 김일성의 지시로 촉발된 사실상 폭동”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여러 차례 반복해 논란을 일으켰다.

■ 유족회 “역사 왜곡 멈추라는 준엄한 경고”
판결 직후 제주4·3희생자유족회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는 제주지법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4·3 왜곡행위에 대한 사법부의 준엄한 심판”이라며 환영 입장을 발표했다. 유족회는 “태 전 의원은 지속적으로 4·3을 왜곡해왔고, 단 한 번도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한 적이 없다”며 “오늘의 판결은 희생자와 유족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의미 있는 판단”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집단 명예훼손의 어려움을 넘어 유족회에 대한 명예훼손을 인정한 첫 사례”라며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더 나아가 유족회는 “표현의 자유 뒤에 숨어 반복돼온 왜곡과 선동이 피해자에게는 폭력이었다”며 “더 이상의 명예훼손을 막기 위해 4·3 왜곡·폄훼 처벌 규정이 포함된 4·3특별법 개정안이 즉각 통과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회원들은 국회를 향해 4·3 왜곡 처벌 규정을 즉각 개정하라고 구호를 외쳤다.

■ 판결의 법적·사회적 의미…“4·3 책임 왜곡의 정치적 악용 차단해야”
유족회 측 공동변호인단도 이번 판결의 의미를 강조했다. 고영권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단순한 민사 분쟁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둘러싼 공적 책임의 문제”라며, 4·3을 김일성 지시로 규정하는 주장 자체가 군경 토벌의 정당화 논리와 연결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고 변호사는 “4·3의 역사적 진실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 사법부가 책임을 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

■ 국가 보고서는 이미 김일성과 무관 명시…왜곡 논란 종지부 찍어야
정부가 공식 채택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사건을 “경찰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한 국가권력 탄압과 단선·단정 반대의 흐름 속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의 민간인 희생”으로 규정하고 있다. 보고서는 4·3이 남로당 중앙당 또는 김일성 일가와는 무관하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태 전 의원의 반복된 주장이 법원 판단까지 받게 되면서, 향후 정치권의 4·3 인식 수준과 왜곡 방지 제도 마련이 다시 주요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이번 판결은 4·3 희생자 명예를 지키기 위한 사법적 대응의 첫 사례이자, 향후 유사한 왜곡 발언에 대한 기준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족들과 단체들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며 국회에 입법적 조치를 계속 요구할 뜻을 밝혔다.

